
“무거운 물건이 많은데 하필 그날 도와줄 어른들이 없어. 영매의식에 쓸 물건이 그 안에 있단 말야. 부탁할게! 나루호도군, 미츠루기 검사님!”
발단은 사소했다. 미츠루기는 법률사무소에 차를 마시러 온 참이었고, 주말 스케줄도 비어있었다. 나루호도의 주말은 언제나 한가했고, 곤란한 표정으로 손을 모은 마요이의 부탁을 달리 거절 할 구실도 없었다. 사건 당일. 앞으로 닥칠 일을 꿈에도 모르는 두 사람은 마요이의 지휘와 하루미의 분투 아래 짐을 날랐다.
무언가 가벼운 것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하미만한 나무장의 양끝을 미츠루기와 나눠잡고 나르던 나루호도는 발에 무언가 걸리는 걸 느꼈다. 파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을 때는 이미 밟고 난 후였다. 구겨진 종이 같았다. “꺄!” 하미가 높은 비명을 질렀다. 나루호도의 발아래에서부터 희고 탁한 안개가 뭉실뭉실 피어올라 그를 감싸고 있었다. 당황해서 피해보려 해도 무언가에 붙들린 듯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루호도군, 미츠루기 검사님 무슨 일이야?”
“마요이군, 하루미군을 데리고 피하게!”
미츠루기가 소리쳤다. 연기는 어느새 그에게 까지 퍼졌다. “나루호도!” 너도 같이 가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힘이 빠진 손이 스스르 미끄러졌다. 미츠루기 쪽에서 버티고 있었으나 곧 나무장이 바닥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어린아이의 높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나루호도군, 정신 차리십시오!”
짜악! 나루호도는 뺨을 올려붙이는 경쾌한 소리와 익숙한 고통에 눈을 떴다. 하미가 울고 있었다. 어찌나 때렸는지 손이 빨갛다. 저기에 맞았을 뺨도 화끈화끈하다. 나루호도와 눈이 마주 친 하미는 입을 크게 떴다.
“일어나셨군요!”
“응. 걱정했구나. 나 괜찮아.”
이제 목소리가 나온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목이 쉰 게 아닌데 목소리가 변했다. 짧고 높은 소리. 위화감을 느끼며 나루호도는 상체를 일으켰다. 앉아있는 하미와 눈높이가 같다. “꺄아!” 얼굴이 빨개진 하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가렸다. 나루호도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치렁치렁한 옷이 작은 몸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뭐....”
“나루호도군도 정신 차렸구나. 다행이야,”
감각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름을 불려서 뒤돌아보았다. 마요이가 주저앉아 있는 어린아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미간의 주름도 눈초리의 사나움도 덜한 동그란 얼굴. 어느 겨울 전학 간 이후로 처음 본다. 무릎까지 내려온 상의와 바닥을 쓸고 있는 하의는 분명 미츠루기가 입고 온 니트와 면바지와 같았다. 저 어린애는 분명.... 그렇다면 나도.
나루호도가 다시 풀썩 쓰러지는 걸 보며 하미는 비명을 질렀다. 마요이는 쓰게 웃었고 미츠루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
“씌었어. 나루호도군이 부순 게 영매에 쓸 매개였거든. 본래의 혼과 빙의된 혼이 섞여서 몸도 영혼도 뒤죽박죽이 된 상태야. 영감이 낮은 보통 사람은 빙의가 아예 불가능하고 초보 영매사에게나 닥치는 실수인데 어떻게 된지 모르겠어. 영이 두 사람과 상성이 좋았나 봐.”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면 미리 치워뒀어야 했네.”
“치워놨어요. 부적과 자물쇠로 몇 겹이나 봉하고 살림살이들로도 막아뒀단 말이에요. 강한 영이 붙은 물건은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에요.”
“밟았을 때 종이나 풍선 같았는데.”
“종이접기로 만든 공이야. 지금은 다시 봉해뒀어. 손으로 직접 만든 물건에는 영이 붙기가 쉬워.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니까 그 모습으로 있는 동안에는 여기에 머물러줘. 내가 어떻게든 제령 해줄게. 만약 원래대로 못 돌아간다면....” “못 돌아간다면?”
나루호도와 미츠루기가 되묻자 마요이는 진지한 표정을 풀고 씩 웃었다.
“앞으로 내 동생이 되서 같이 살자.”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마요이군.”
“어린애한테 군이라고 불리니 기분 이상하네.”
“그거 마요이가 할 소리가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여기에 있는 동안 이 옷을 입어줘. 심신을 깨끗하게 만드는 수행자의 옷이야.”
마요이는 잘 개어진 옷을 건네주었다. 보라색 하오리와 기모노. 마요이와 하미가 입고 있는 옷과 같다. 펼쳐보니 남자아동용인 것 같으나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남은 것은 길 다란 천 한 장 뿐. 미츠루기의 것도 같은지 곤란한 눈과 마주쳤다. 나루호도는 자리를 뜨려는 마요이에게 물었다.
“이거 훈도시지. 이렇게까지 맞춰 입어야해?”
“꼭 그런 건 아닌데. 쿠라인 마을에선 영매사가 될 수 없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일찌감치 마을 밖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아. 그 옷도 겨우 구한 거야. 사오기에는 내가 제령 준비를 하느라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그걸로 참아줘. 둘 다 훈도시 맬 줄 알지?”
“모르는데.” “모른다.”
“....”
누가 무슨 말을 꺼내도 부적절한 상황이다. 잠시 동안의 정적 끝에 미츠루기가 헛기침을 했다.
“내가 이토노코기리 형사에게 연락하지.”
안도의 한숨이 나루호도와 마요이에게서 동시에 터졌다.
*
“아직 뛰놀고 싶은 나이에 수행이라니. 검사님의 조카분이라선지 기특함다. 열심히 하십쇼!”
“...고맙ㄴ...고맙습니다.”
근무 중에 잠깐 불려나온 이토노코 형사는 미츠루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돌아섰다. 미츠루기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제대로 감사인사를 했다. 옆에서 나루호도가 웃자 미츠루기는 나루호도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형사가 다녀간 후로는 하미와 마요이가 평소에 하는 것과 같은 수행을 했다.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폭포를 맞으며 명상을 하고 난 후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를 경문을 외웠다. 미츠루기는 잘해내는 것 같았지만 나루호도는 좀이 쑤셨다. 식사도 몸을 가볍게 만드는 채식이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심심해서 마요이가 왜 기름진 미소라멘에 환장하는 지 알 수 있었다.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겨우 하루가 저물었다, 잠도 일찍 자야 해서 나루호도는 미츠루기와 탕을 같이 썼다. 미츠루기는 공중탕도 이용해 본 적 없는 듯 타인과 하는 목욕을 어색해 했지만, 나루호도가 대강 몸만 담그고 탕에서 나가려고 하자 붙잡아 앉혀 100까지 세게 했다. 나루호도는 미츠루기에게 물 튀겼고, 미츠루기도 가만있지 않았다. 둘은 진짜 나이도 잊어버리고 장난을 하다가 하미가 문을 노크해서 부랴부랴 목욕을 끝냈다. 물기를 닦고 나오자 하미가 잠을 잘 방을 안내해주었다.
“이불을 깔아놨으니 여기서 주무시면 됩니다.”
“고마워. 하미야. 너도 잘 자.”
“흑. 나루호도군이 원래대로라면 마요이님 방으로 모실 기회인데...!”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니....”
“그러고 보니 만약 돌아가지 못한 다면 우린 계속 하루미군과 같은 또래로 자라겠군,”
“꺄! 안됩니다! 나루호도군은 마요이님께 일편 단심이여야 합니다! 미츠루기 검사님은.... 안됩니다! 좀 더 어른이 된 후에!”
“알았으니까 그만 자자.”
“네 두 분 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좋은 꿈꾸게.”
하미는 호들갑을 거두고 미소 지었다. 하미를 보내고 나루호도와 미츠루기는 서로 누울 자리를 정하느라 잠시 다투었다.
*
어쩐지 잠이 오지 않아 나루호도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미츠루기와 같이 목욕하고 한방에서 잔다. 어렸을 때도 해보지 못한 일이다. 미츠루기의 아버지는 엄하지 않았지만,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녀석 쪽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만약 더 오래 같이 지냈다면 그때는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나간 시간들. 다시 주어질 일이 없었던 무한한 가능성과 불안. 팔을 들어 올리자 어둠이 익은 눈에 작은 손이 보인다.
“만약 이대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거야?”
“나이와 상관없이 법률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미국으로 가서 다시 검사가 될 거다.”
“마요이 동생 될 생각은 없고?”
미츠루기도 깨어있었는지 바로 대답한다. 나루호도가 농담을 하자 후, 웃는 건지 콧방귀를 뀌는 건지 알 수 없는 숨소리가 들린다.
“나도 갈까. 변호사 천직 같고.”
“...자네에게는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
“이젠 신경 쓰지 마. 변호사가 되기로 해서 치히로씨와 마요이랑 하미도 만났고. 일도 적성에 맞는걸.”
“신경 쓰지 않을 순 없다. 평생의 은혜야.”
아무 말도 못했다. 나루호도도 학급재판은 평생 못 잊으니까 마찬가지다. 미츠루기와는 떨어질 수 없는 인연으로 묶여 있는 걸 실감한다. 한때는 녀석을 자신 안에서 죽였다고 착각한 적이 있지만 불가능했다. 서로의 유대는 나루호도가 나루호도이고 미츠루기가 미츠루기인 한, 어떤 삶을 겪고 다시 어른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해도 이 녀석이 있다면 언제든지 되돌아 올 수 있다. 둘은 서로에게 그런 존재였다.
“...나도 고마워.”
“흠.”
이번 숨소리는 쑥스러워 하는 거 란걸 분명히 알겠다. “그만 자자.” 미츠루기가 이불을 푹 뒤집어쓰는 소리를 듣고 나루호도는 미소 지었다.
*
꿈을 꾸었다. 색종이를 풀로 붙이고 바람을 넣어 공을 만들었다. 그 아이에게 선물로 주고 싶었다. 친구가 되고 싶었다. 뒤를 따라갔지만 차마 전해주지 못했다. 바람이 불어 공이 날아갔다. 바람을 타고 저만치 날아간 공은 강위로 떨어졌다. 가장자리에 있으니 떠 있으니 건져낼 수 있을 거 같았다. 강가에서 한껏 팔을 뻗던 아이는 그만 몸의 중심을 잃고 빠져 버렸다.
꿈을 꾸었다. 뒤쫓아 오는 걸 알고 있었다. 나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조금만 애태우다 못 이기는 척 받아주려고 했다. 뒤 따르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작은 손이 수면 위를 허우적거리다 가라앉았다. 물에 떠올라 있는 종이공과 기포. 안 돼. 정신없이 물 위로 뛰어들었다.
나루호도와 미츠루기는 어린 모습 그대로 풀벌레가 우는 강변에 서 있었다. 손을 잡은 아이 둘이 그들을 마주 보고 있었다. 한 아이는 남은 손으로 종이 공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 친구로 지낼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 아냐. 나야말로 공 망가트려서 미안해.
- 괜찮아. 재밌었어.
- 잘 가.
아이들은 손을 흔들고는 뛰어서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나루호도와 미츠루기는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 날 새벽. 둘을 깨우기 위해 장지문을 젖혔던 마요이는 풋 웃어버렸다. 어른 둘이 코고는 소리가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