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리스.”
문 너머에서 어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역시나. 아이리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대답했다.
“들어와.”
천천히 문이 열리고,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남자아이는 낯이 익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아이의 정체는 뻔한 일이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성인 남자의 셔츠를 엉성하게 둘러 겨우 몸을 가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작은 몸집이 더 작아 보였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가, 혼자 세웠던 가설이 맞은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이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어제 차에다 대체 뭘 넣은 거야?”
“아...아니, 차에는 넣지 않았어.”
“그럼?”
“플라스크를 다 써서, 잠깐 눈앞에 있던 찻주전자에 담았다가... 다 씻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왜 홈즈군은 어려지고 나는 나이를 먹은 거야?”
“효과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어서...”
“나 참, 미리 말이라도 해 줬어야지.”
“그, 미안...”
고개를 숙이는 홈즈를 팔짱을 낀 채 말없이 보고 있던 아이리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어젯밤 잠들었을 때보다 배는 길어진 손가락으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손끝을 간질여 자신도 모르게 키득, 작게 웃으니 꼬마가 앵돌아진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뭐야, 애 취급하는 거야?”
“그럼 애 아니고 뭐야? 이렇게 귀여운데.”
“...아이리스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까 어째 기분이 애매한데.”
그 때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홈즈가 놀란 듯 펄쩍 뛰더니 방 밖으로 달려나가려 했으나, 먼저 눈치챈 아이리스가 어깨를 잡는 바람에 제지당했다. 홈즈는 바둥거리며 외쳤다.
“분명 그렉슨이야. 어제 수사를 시작한 사건에 관한 연락이라고!”
“그래서 지금 이대로 나가겠다는 거야?”
“당연하지! 사건이 명탐정을 필요로 하는데-”
“다섯 살짜리 애를 잘도 폴리스 라인에 들여보내 주겠네.”
때르릉. 때르릉. 전화벨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던 홈즈가 별안간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아이리스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이리스가 도와주면 되잖아.”
“그럴 줄 알았어...”
예상 가능했던 전개에 한숨을 쉬면서도 아이리스는 잠자코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이 목소리를 듣고 그렉슨이 기절초풍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여보세요.”
“여보세... 아, 셜록 홈즈 사무소 아닙니까?”
“응, 맞아.”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너무한데. 이젠 내 목소리도 잊은 거야?”
일부러 장난스럽게 묻자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곤혹스러운 듯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경악스러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시작하는 것을 들으며 아이리스는 가까스로 웃음을 참았다.
“서, 설마, 아, 아가, 아가씨...”
“이제야 알겠어?”
“아니, 그런데 목소리가... 감기라도 걸리셨는지...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홈즈군이라면 같이 있어.”
“아, 예. 그.. 사건 현장으로 지금 당장 와 달라고 전해 드릴 수 있으실지요?”
“알았어.”
아이리스 곁에서 통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홈즈가 그 대답에 겨우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아이리스는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뒤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나가야지. 옷 갈아입자.”
“진짜 애기 취급이네.”
“근데 입을 옷은 있어?”
“있을 리가. 탐정 사무소까지 어린 시절 입던 옷을 가지고 왔을 리가 없잖아.”
결국 그는 아이리스가 입었던 프릴 달린 셔츠에 멜빵 바지, 새하얀 니삭스와 에나멜 구두를 신어야 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저기압이 된 그와는 대조적으로 아이리스는 환히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 어울리네, 홈즈군! 꼭 맞춘 것 같은데.”
“놀리는 거지? 아이리스...”
“아냐 아냐, 정말이야. 이제 출발하자, 빨리 가야지.”
“이 나이에 이런 걸 입어야 하다니...”
우거지상을 하고서 투덜거리는 아이의 손을 잡아끌고 아이리스는 마차를 불러세웠다. 남자아이치곤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이를 데리고서 어제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난 사건의 현장으로 가자고 하는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인을 수상하게 생각하려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마부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마차가 둘을 내려 주자마자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찰관들이 눈에 들어왔다. 둘은 바짝 긴장되었다. 과연 이들이 둘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일단은 대강 전말을 파악하고 있는 그렉슨에게 먼저 다가가기로 했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감자튀김을 씹고 있던 그가 다가오는 둘의 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가, 예상보다 훨씬 충격적인 모습에 그만 입을 떡 벌렸다.
“좋은 아침이야, 그렉슨.”
“서, 설마, 아가씨... 게다가 이건?”
“실례잖아, 사람보고 ‘이거’라니.”
손가락질까지 당해서 볼멘 소리로 항의하는 홈즈를 무시하고 그렉슨은 놀란 표정인 채로 아이리스의 답을 기다렸다. 아이리스는 난감한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끄덕였다.
“...응. 홈즈군 맞아.”
“하느님 맙소사...”
그렉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 놈의 탐정이 결국 사고를 치는구만, 이상한 약만 그렇게 발명을 해 대더니.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라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이래서야 수사를 시키기는 영 글렀는데...”
“무슨 소릴. 작아졌어도 이 천재적인 두뇌는 그대로라고.”
“수사에 다섯 살은 돼 보이는 꼬맹이를 데리고 다니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옥신각신하는 둘을 보던 아이리스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여전히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던 둘의 대화를 끊고 제안을 하나 하기 위해.
“저기, 둘 다.”
“응?”
“네?”
“내가 보호역으로 붙어 있으면 안 될까?”
“보호역이라고?”
둘 다 놀라는 표정이 볼 만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렉슨이 명백히 난색을 표하고 있는 한편, 홈즈는 다소 굴욕감을 느끼는 듯한 얼굴이었다는 점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천하의 명탐정이 보모가 필요한 신세가 되었다니, 뭐 그런 류의 한탄이겠지. 아이리스는 아랑곳않고 설득을 계속했다.
“수사를 위해서는 홈즈군의 협조가 필요해. 하지만 보다시피 홈즈군은 너무 어려서 이대로 진지하게 사건 현장에 끼워 줄만한 어른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래도 보호자가 있다면 훨씬 나아지겠지. 야드 사람들 납득시키는 거야 그렉슨군이 할 거고. 그렇지?”
거의 일방적으로 통보한 후 생긋 웃는 아이리스를 보고 둘 다 아무런 토를 달지 못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떨떠름해하면서도 그렉슨은 둘을 폴리스 라인 안으로 들여보냈다. 처음 보는 숙녀와 꼬마가 성큼성큼 걸어들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순경들이 앞다투어 그렉슨에게 와 물었다.
“경감님, 저건 대체...”
“...그런 사정이 있어.”
“그 탐정이 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바쁘다고 해서. 대리로 왔어.”
“대리로... 저 여자분은 그렇다치고, 꼬맹이까지요?”
“좌우지간 냅둬,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책임은 내가 진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니는 그 말 앞에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홈즈가 현장을 조사할 때면 언제나 그랬듯, 둘은 다른 이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서 정신없이 이 곳 저 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갑자기 작아진 자신의 손발의 크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번번이 물건을 놓치거나 넘어질 뻔하는 아이를 보며 그렉슨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외의 모두가 저거 정말 괜찮은 걸까, 차마 말로는 못 하고 전전긍긍하며 지켜보았다. 다행히 위험해 보일 때마다 아이의 보호자가 곁에서 돌발행동을 제지하며 적재적소에 도움을 주어서 어떻게든 일이 무사히 풀렸기에, 다들 안절부절 못 하다가 안도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렇게 둘의 모습을 보던 그렉슨이 문득 강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저 모습을. 나이가 바뀌어봤자 본인이니 비슷한 얼굴이겠지만, 그런 정도가 아니다. 저 얼굴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야드 사람들을 수심에 빠지게 해 놓고 홈즈는 아랑곳없이 물건을 뒤질 수 있을 만큼 다 뒤지고 시약을 쓸 수 있을 만큼 썼다. 그가 말하기도 전에 원하는 장비를 알아서 척척 꺼내 주는 아이리스 덕에 수사가 매우 순조로웠다.
“괜히 10년 동안 함께 산 게 아니네,”
“당연하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은 것도 잠시, 다음 순서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조사해야 할 증거품 중 하나가 너무 높은 선반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물론 6피트가 훌쩍 넘는 평소의 그라면 아무런 어려움없이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이 될까말까한 지금의 키로는 어림도 없다. 낭패에 빠진 그는 아이리스를 올려다봤다.
“어떡하지?”
“의자를 쓸 수도 없고...”
“아이리스가 집어다 주면 안 돼?”
“안 돼, 지문 묻잖아.”
“딱 한 번만.”
“안 된다면 안 돼.”
이거야 원, 무슨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쓰는 조카를 타이르는 고모라도 된 것 같네. 아이리스는 이마를 짚고,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이들은 이 기묘한 상황을 어떤 표정을 짓고 지켜봐야 하는지 몰라 쩔쩔맸다. 아이리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무언의 시위를 하는 홈즈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그의 등 뒤로 돌아가 섰다. 불길한 예감에 뒤돌려던 그보다 아이리스가 빨랐다. 양쪽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고 들어올리자, 당황한 홈즈가 바둥거리며 항의했다.
“이, 이거 놔!”
“시야가 확보돼야 증거를 보든 말든 하지.”
“다른 방법이 있을 거 아냐!”
“다리 좀 가만히 있어, 무거워.”
소동을 일으키는 둘을 보고 더러는 깜짝 놀랐으며, 더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더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연신 그렉슨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모른 체했다. 사실 그로서는 항상 지긋지긋하게 약올리는 홈즈가 저런 꼴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비어져나오려 했지만, 체통을 생각해서 필사적으로 참았다.
다섯 살배기 남자아이의 체중을 내내 견딘 아이리스의 노고 덕에 추리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고, 홈즈는 수사관들에게 던진 몇 번의 질문 끝에 사건의 진상을 단숨에 파악했다.
“그럼 슬슬 시작할까, 셜록 홈즈의 ‘논리와 추리의 실험 극장’을!”
신나게 소리치는 꼬마아이를 보며 부하들은 일제히 두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어디서 많이 듣던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명인가가 되뇌였다.
“셜록 홈즈..?”
“아, 원체 그 탐정놈을 동경해서 따라하는 걸 좋아한다더라고.”
얼른 수습을 하면서 그렉슨은 들떠 있는 홈즈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당최 자중이란 걸 할 줄을 몰라. 어쨌거나 외견이 어린아이가 되어도 역시 그는 명실상부한 명탐정 셜록 홈즈였다. 아이리스가 이따금 보조를 맞춰 주는 가운데 순식간에 사건을 해결해 버렸으니까. 게다가 손가락질하는 움직임이며 고개의 각도, 모자를 눌러쓰는 몸짓까지 모든 것이 평소의 그와 똑같았다.
“정말 많이 좋아하나보네요, 완전히 똑같네.”
“귀여운 구석이 있네.”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몇몇 순경들을 보며 그렉슨은 기가 찼다. 귀엽긴 개뿔. 저놈의 정체를 알면 절대 그렇게 웃으면서 볼 수 없겠지. 추리를 마치고 으스대는 표정을 하고서 이리로 걸어오는 홈즈를 보자 이제는 한숨도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 잘 했다, 잘 했어.”
“이 정도야 당연한 일이지,”
“고마워, 그렉슨군!”
“아닙니다, 아가씨. 전 처음부터 잘 해결하실 거라 믿었습...”
미소짓는 아이리스에게 얼른 달라진 어조로 대답하다 말고 그렉슨은 말꼬리를 흐렸다. 데자뷰의 실체를 알았다. 저 길게 늘어뜨린, 약하게 컬이 들어간 분홍빛 머리카락. 이지적인 눈매와 미소지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 그의 머릿속 ‘원본’은 아이리스가 아니다. 훨씬 더 옛날에, 실제로 본 적이 있는-
회상은 짧고 강한 통증과 함께 끝났다. 홈즈가 있는 힘껏 그의 발을 밟은 탓이다.
“아야! 뭐 하는 거야 지금!”
“아, 발이 미끄러졌네.”
“어리다고 봐 줄 줄 알면 큰 코 다칠 줄 알아!”
“너무한데, 명색이 스코틀랜드 야드의 형사가 어린애를 상대로 너무 험악한 거 아냐?”
유치한 말다툼을 하는 둘의 사이에 아이리스가 끼어들었다. 홈즈의 어깨를 잡고 제 몸 뒤로 숨기듯 돌리는 모습이 마치 말썽꾸러기 아들을 떼어놓으며 억지로 집에 데리고 가려 하는 엄마같다고 그렉슨은 생각했다.
“아무튼 오늘 고마웠어. 들어가 볼게!”
“예, 안녕히 가십시오!”
경례를 붙이는 그에게 아이리스는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휴, 이제야 겨우 이 소동이 끝났네. 한 숨 돌리려는 차에, 아직 이 쪽을 보고 있는 홈즈와 눈이 마주쳤다. 무섭도록 진지한 표정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전혀 걸맞지 않을 만큼. 그는 눈빛으로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아이리스에게는 티내지 마.
그렉슨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저 녀석에게는 당할 수 없어. 아까 잠시 성인의 모습을 한 아이리스를 보고 말을 멈추었을 때, 왜 동요했는지를 바로 깨달은 거겠지. 그리고 한시바삐 부자연스러운 침묵을 깨기 위해 발을 밟았던 거였겠지. 그는 바로 홈즈를 마주보며 마찬가지로 눈으로 대답했다.
여부가 있겠어, 명탐정 나으리.
그의 답을 알아들은 홈즈는 씩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리스의 손을 잡고서. 둘의 뒷모습을 얼마간 지켜보고 있던 그렉슨 역시 그들을 등지고 철수를 명하기 시작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손을 잡은 채 걸었다. 손 안에 홈즈의 손이 쏙 들어오는 게 신기하다고 아이리스는 생각했다. 자신보다 작고 약한 아이를 향한, 지금까지 홈즈에게 품었던 마음과는 결이 다른 애정 역시.
“있잖아, 아이리스.”
“응.”
조금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홈즈가 물었다. 아까까지의 기세등등한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아이리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자, 홈즈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대로.. 원래대로 안 돌아오면 어떡하지?”
“걱정돼?”
“그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되묻는 아이리스에게 항변하듯 목소리톤을 높였다가, 홈즈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홈즈군답지 않은데.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리스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시간이 지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듯한 그에게 결국 이 쪽의 생각을 먼저 말하기로 했다.
“사실 난 신기해. 홈즈군이 이렇게 미안해하고 있는 게.”
“...”
“아침만 해도 그래. 평소같으면 ‘와하하! 아이리스! 이걸 봐!’ 하면서 뛰쳐들어왔을 텐데...”
“내가 그렇게 대책없는 인간이란 말이야?”
“아니라고 할 수 있어?”
“반박하긴 힘드네.”
그 말에 아이리스는 풉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홈즈가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만 바뀐 거라면 뭐, 놀라운 발명이라고 흥분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너까지 영향을 받아 버렸잖아. 너는 아직 10살밖에 되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10년이 넘는 세월을... 잃어버린 거나 마찬가지잖아. 네가 겪었어야 할 10대의, 20대의 나날을.”
“...”
“솔직히, 아빠로서 딸이 커 가는 걸 보는 게 얼마나 큰 낙인지 너는 모를 거야.”
“이렇게 조그만 애가 ‘아빠로서’라고 하니까 좀 많이 이상한데.”
“어, 어쨌든.”
아이리스는 헛기침을 하는 홈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홈즈는 여전히 이런 행동에 적응되지 않은 듯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이번에는 잠자코 있었다.
“홈즈군이 더 고생이지. 지금까지 쌓아올린 게 무너져 버리잖아. 혼자서는 수사도 마음껏 못 할 거고, 어린애의 말은 아무도 진지하게 들어 주질 않고. 체격적으로도 약자가 돼 버렸으니까.”
“뭐... 원흉이 나 자신이니까 어쩔 수 없지.”
낙담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그를 아이리스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의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추고는, 조금 놀란 듯 동그렇게 뜬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마음을 담아 말했다.
“괜찮아, 홈즈군. 내가 지켜 줄게.”
“...”
“홈즈군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 줬던 것처럼.”
순간 그녀에게 평소의 아이리스가 겹쳐 보였다. 열 살짜리 의학박사, 자랑스럽고 기특한 딸. 또래보다, 아니 가끔은 자신보다도 훨씬 어른스럽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여린 면이 숨어 있는, 런던의 어둠으로부터 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지켜 주고 싶은 아이. 그 아이리스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주다니. 가슴 안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오르는 것 같았다. 입술을 깨문 채 서 있는 홈즈의 머리를 아이리스가 다시 쓰다듬고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배고프지 않아? 뭐라도 먹으러 가자.”
“응. 뭐 먹을까?”
“글쎄... 피쉬 앤 칩스만 아니면 될 것 같아.”
“그럼 피쉬 앤 칩스.”
“자꾸 그러면 나 혼자 먹을 거야.” 부러 볼멘 소리를 하는 아이리스를 보며 홈즈는 키득거렸다.
다음날 아침, 아이리스는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잠에서 깼다. 여기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이어진 노크 소리는 어제 아침과는 사뭇 달랐다.
“들어와...”
졸린 목소리로 답하자마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고 아이리스는 힘없이 웃었다. 만면에 희열에 찬 표정을 띤 홈즈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리스! 돌아왔어!”
“응, 그런가 보네.”
자신 역시 어느새 열 살짜리의 모습대로 돌아와 있었다. 뭐 이렇게 될 거란 생각은 했다. 애초에 정량(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을 투여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마음은 한결 홀가분해졌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홈즈는 아이리스의 앞에 앉아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아, 다행이야. 이제 다시 일상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어졌어. 그렉슨이 어제 날 보고 얼마나 웃음을 터뜨리려고 했는지 알아? 부하들 앞이라 참고는 있는데 웃겨 죽겠다는 표정에 완전 약올랐다고. 다음에 보면 따져야겠는데. 그리고-”
쉬지 않고 따발총처럼 이야기하는 그는 평소보다도 훨씬 시끄러웠다. 마치 어제 하루 동안 풀이 죽어 있었던 만큼을 보상받으려는 것 같았다. 정말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네. 피식 웃고서 아이리스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그마한 손이 머리에 닿는 촉감에 홈즈가 말을 멈추자, 아이리스가 빙그레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조금 서운한데. 꼬마 홈즈군도 꽤 귀여웠는데.”
“...”
“이제는 내가 홈즈군의 엄마 역할을 할 차례인가, 했는데.”
따뜻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이 쪽을 보는 아이리스의 모습에, 어제 자신의 눈높이에 맞춰 말을 걸어 온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때 느꼈던 놀라움, 안도감, 기쁨, 포근함을 아이리스는 아마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큰 선물을 줬는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홈즈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되뇌이며 아이리스를 살며시 품에 껴안았다. 잠시 놀란 듯 가만히 있다가 마주 안아 온 아이리스에게 그는 속삭였다.
“고마워, 아이리스.”
“...”
“너는 항상 날 지켜 주고 있어.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나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이리스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들키지 않으려 홈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등에 두른 팔에 힘을 줘서 더 꽉 끌어안으며.
“고마워... 홈즈군.”
“응.”
둘은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아침 햇살이 둘의 뺨을 부드럽게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