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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던의 밤이 찾아오자 순경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막 3년차를 찍은 토바이어스 그렉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며 안개 가득한 어둠을 밝힌다. 위태롭게 고정해 둔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며 그렉슨은 한숨을 쉬었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나.
 물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런던에서 나고 자란 이상, 스코틀랜드 야드의 경찰관들의 업무가 많다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들어 잘 알았다. 강력계 형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부터, 닥쳐올 시련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줄곧 해 왔다. 그러나 막상 직접 되고 보니, 직접 현장에 떨궈뜨려져 아침부터 밤까지 끊임없는 잡무에 시달리다 보니, 사건이 발생해도 침착하게 범인의 특성이나 범죄의 본질에 대해 분석할 여유는커녕 주먹구구식으로 우왕좌왕 뛰다 보니 급속도로 늘어가는 것은 피로와 회의뿐이었다. 아무리 뛰고 굴러도 전혀 성장하지 않고 그저 소모되기만 하는 느낌. 이런 건 그가 생각한 ‘형사’의 길이 아니었다.
 “...그렉슨! 토바이어스 그렉슨!”
 “예, 예!”
 얼른 정신을 차리자 자신을 마뜩찮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경위가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이크. 그렉슨은 뒤늦게 긴장했다. 질책과 힐난이 한바탕 쏟아질 거라 예상했으나, 다행히 그는 잠시 후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온몸에 힘을 주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경위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벌써 이걸로 6건째다. Fairy Fay 사건 후로 자그마치 8개월째 그 놈이 이스트 엔드를 떠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두고 있다고. 빨리 막지 못하면 앞으로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길 게 뻔하다. 정신 단단히 붙들어매고 수사에 임하도록. 해산!”
 해산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경찰관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Fairy Fay 사건. 입 안에서 조용히 발음한 자음과 모음들이 피비린내나는 사건 현장의 기억을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스트 엔드 중에서도 특히 우범 지역인 화이트 채플에서 신원 미상의 젊은 여성이 배에 말뚝이 박힌 채 쓰러져 있었다. 이제 변사체를 보는 데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해 왔던 그는 곧 자신의 생각을 부정해야 했다. 처음으로 시체를 맞닥뜨렸을 때 이후로 오랜만에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두 달 후에는 38세의 과부가 하반신을 수차례 찔려 사망했다. 한 달 후에는 신원 미상의 여인이 목을 두 차례 찔렸으나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1주일도 안 되어 이번에는 45세 매춘부가 두세 명의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다. 체내에 둔기를 삽입당하기까지 한 그녀는 향후 입원하였으나 2일 후 숨을 거두었다. 잠시 동안 소강기를 가졌나 싶기가 무섭게 넉 달 후에 39세 매춘부가 자그마치 39군데에 달하는 자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여섯 번째 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피해자는 화이트 채플의 매춘부였으며, 목과 하반신을 반복적으로 찔려 사망하였다. 온 런던이, 아니 영국이 이 살인귀의 행각에 들썩였다. 온갖 타블로이드지가 연이은 잔혹한 범죄를 대서특필했다. 새벽녘의 어두운 이스트 엔드의 뒷골목에 놓인 피해자의 시체를 발견하는 순경의 삽화와 함께 짧은 기사를 실은 1페니짜리 호외가 날개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여론은 번번이 범인을 놓치는 스코틀랜드 야드에게 야유를 보내는 동시에, 미꾸라지처럼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희대의 살인마에 열광했다. 대문짝만한 헤드라인 아래 연이어 억측과 날조가 난무하는 기사들이 실렸다. ‘여섯 번째 피해자 발생!’, ‘이스트 엔드의 도덕적 타락에 경종을 울리다’, ‘범인은 변태성욕자?’ ‘수수방관하는 스코틀랜드 야드’ ‘잡히지 않는 것은 내부자의 소행이기 때문?’... 수준 낮은 헤드라인이 가득한 신문을 그렉슨은 신경질적으로 접어 책상 위에 내팽개쳤다. 그 모습을 본 동료가 무심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 걸 봐서 뭐해.”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도움될 거 하나 없어. 피비린내를 맡기가 무섭게 몰려드는 상어떼같은 놈들이야.”
 “이해할 수가 없어. 어떻게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 놈한테 다들 정신을 파는 거지?”
 “자극적이잖아. 내가 당할 일은 절대 없는 끔찍한 살인.”
 그의 말을 반추해 본다. ‘내가 당할 일은 절대 없는’. 피해자는 전부 이스트 엔드, 즉 ‘신이 버린’ 슬럼가의 빈민들 가운데서도 나이 든 매춘부들이다. 당장 없어져도 아무도 찾지 않을. 수소문한대도 시신을 수습해 줄 가족이 나올지 의심스러운.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그렉슨을 곁눈질하고는 동료가 덧붙였다.
 “게다가 범인은 미스테리하고 용의주도하기까지 해. 영웅시하는 놈들도 있다고 들었어.”
 “하, ‘미스테리’? ‘영웅’? 친애하는 런던 시민들의 판단력은 어린애 수준도 못 되는군. 매춘부만 골라 죽이는 남자만큼 동기가 투명한 살인범이 어딨나? 자길 인정해 주지 않는 여자들에 대한 분노를 애먼 데다 푸는 거지. 저항하기 힘들고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 피해자만 골라서 말이야.”
 “우리한테야 상식 중에 상식이지만 안 그런 사람들도 많은 걸 어쩌겠나. 아무튼 우린 해야 할 일이나 하자고.”
 동료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렉슨은 한숨을 쉬었다. ‘해야 할 일’. 이미 야드의 구성원들이 총출동하여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수백 명을 심문하였고 그 때마다 셀 수 없는 증언을 받아 교차검증을 하며 의심되는 용의자들을 낱낱이 뒤졌다. 직무 태만을 의심하는 잘나빠진 기자놈들을 붙잡아 와 한 번 보여 주고 싶었다. 이래도 우리가 수수방관하고 있는지 물으며. 하기사, 그들의 반응은 예상이 갔다. 별 지루하고 시덥잖은 소리를 한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말하겠지. 결국 못 잡지 않았냐고.
 미처 수사 자료를 정리도 못 다했을 때 다음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자상과 범죄 수법은 이번에도 지난 살인사건들과 일치했다. 화이트 채플, 매춘부, 47세. 긴 나이프로 목을 거의 절단되다시피 베었으며, 몇몇 장기가 적출되었다. 이번에도 이렇다할 단서는 찾지 못했다. 철저히 그늘 속에 가려져 있던 범인은 얼마 후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런던의 언론사에 날아든 한 통의 편지에는 마치 핏빛과도 같이 시뻘건 글씨로 살인 예고와 경찰을 향한 조롱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힌 서명이 곧 그의 호칭이 되었다. 잭 더 리퍼. 이 희대의 살인마를 부를 이름을 부여받은 기자들이 앞다투어 지면에 잭 더 리퍼의 이름을 올렸다.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편지를 넘겨받은 수사팀은 ‘친애하는 보스에게’라 시작하는 내용을 읽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자기현시욕이 뒤를 밟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겼나보군.”
 “아니면 잡히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거나.”
 “둘 다일지도 모르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상관과 동료들 사이에서 그렉슨은 편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저 이름이 실체를 입고 혼자 걸어나갈 것 같다는,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사태를 야기할 것 같다는 예감.
 “왜 그러나?”
 그의 침묵을 미심쩍게 여긴 상관의 목소리가 생각의 흐름을 끊었다. 그렉슨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고작 3년차가 입을 놀릴 만한 계제가 아니다. 말하는 순간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 될까 염려스럽기도 했고.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됐고. 그나저나 이 편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단서는 없나?”
 “심리학자의 자문을 구할까요?”
 “외부인이 수사에 개입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리고...”
 회의가 이어지고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그렉슨은 자꾸만 목청을 높이는 자신의 직감을 겨우 눌렀다. 어쨌든 팀에서 정해진 방침대로 묵묵히 따라야 했다.
 이후 이어진 사건의 전개는 그의 직감이 한 경고의 수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잭 더 리퍼를 자칭하는 자극적인 내용의 편지들이 끊임없이 신문사에 날아들었으며, 언론 통제를 신신당부한 야드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온갖 타블로이드지에는 연이어 끈적한 잉크로 적힌 편지들이 그대로 실렸다. 지면 너머로 피비린내가 훅 끼쳐올 것 같은 글귀들 중에는 나중에 터무니없는 날조로, 심지어는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해 기자가 작성한 것으로 밝혀진 것들도 있었다.
 당연히 모방범의 행동은 편지로만 그치지 않았다. 나이 든 매춘부들이 계속해서 참혹하게 죽어나갔다. 수사관들은 그 중 ‘진짜’ 잭 더 리퍼의 범행과 그렇지 않은 범행을 가려내기 위해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피해자의 신체의 자유를 빼앗은 수법. 칼자국으로부터 추정되는 칼의 길이와 날카로운 정도. 찌른 부위와 횟수. 마치 도축장의 돼지처럼 ‘해부’하고 장기를 꺼내 간 방식. 감식반에서 넘어온 산더미같은 서류를 넘기며 그렉슨은 이따금 정신이 아득해졌다. 지금 이 여인들을 난도질한 게 잭 더 리퍼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이들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너무도 쉽게 죽어 가고 있다는 현실이 아닌가? 여론은 살인범의 엽기적인 행각에만 지대한 관심을 보일 뿐 피해자에게는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슬럼가 출신의, 그것도 몸을 함부로 굴려대는 ‘매춘부’였으니까. 사실 함께 수사를 하는 순경들도 은연중에 그런 사고방식을 비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사건이 이렇게까지 끔찍하지 않았다면 적당히 처리하고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로에 시달릴 때 자신 역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짜증이 밀어오르곤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방금 품은 작은 짜증보다 갑절은 큰 자기혐오와 죄의식이 그를 덮쳤다. 젊은 그렉슨은 점점 자신이 품었던 꿈이 어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건 그가 생각한 정의가 아니었다. 이런 건 그가 꿈꿔 온 경찰관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사에 진척이 없어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을 무렵,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그렉슨은 한숨을  쉬며 가로등 앞에 사다리를 대고 올라갔다. 평소처럼 불을 붙이고 내려오려고 하던 차에 이변이 일어났다. 발밑이 갑자기 크게 흔들리고, 그는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사다리가 쓰러진 것이다. ‘아니, 갑자기 왜? 실수라도 했단 말이야? 몇 번을 해 온 일인데.’
 당혹한 채로 바닥에 넘어진 그는 바로 그 이유를 알았다. 쓰러진 그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키가 그닥 크지 않은 아이의 얼굴 윤곽이 가로등의 역광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사다리를 걷어차 넘어뜨리고는, 자신이 한 일의 결과를 말없이 지켜보는 아이를 그렉슨은 잠시 어이없어하며 올려다보다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그제서야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리 와!”
 고함을 치며 달렸지만 꽤나 빨리 달아나는 아이와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다. 내가 살다살다 이런 유치한 장난이나 치는 꼬맹이에게 놀아나야 하다니. 그렇잖아도 할 일이 태산인데. 평소의 그라면 도망가게 두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붙잡아 혼쭐을 내 주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영영 도망갈 것 같던 아이도 성인 남성, 그것도 순경의 체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렉슨에게 옷깃을 잡히자 아이는 발버둥치며 외쳤다.
 “놔!”
 그 목소리에 그렉슨은 적잖이 놀랐다. 앳된 소녀의 목소리였다. 모자를 눌러쓴 데다가 품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어서 알지 못했다. 그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꾸중하듯 말했다.
 “뭐하는 거야, 이 밤중에.”
 “멍청한 경찰 나으리 엿 좀 먹이려고 했다, 왜!”
 안개가 자욱한 어둠 속에서도 마주본 눈 속에 이글거리는 분노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오히려 그렉슨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이 어린 아이가 이렇게까지 공권력에 적의를 보이게 된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우선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길래.”
 “정말 몰라? 여기서 사람이 이렇게 죽어나가는데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아. 저번에도 그랬어. 살인이 났다고 소리치는 걸 듣고도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그 말에 며칠 전 심문했던 주민의 증언이 생각났다. 귀찮다는 티가 역력한 남자는 퉁명스럽게 짧은 답을 연이어 내뱉었더랬다.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는 만큼 발휘하며 겨우 심문을 이어가다가, 그나마 의미있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그러니까 없대도... 아, 그래. 새벽에 작게 누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수다. 사람이 죽었다고.’
 ‘댁 가까이에서요?’
 ‘그렇게 가깝진 않았던 것 같은데, 원체 작게 들렸으니까. 뭐, 나랑은 상관없으니까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사실 증인의 태반이 이런 식이었다. 하나같이 진지하게 협조할 이유가 자신에게 있을 리 만무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이들에게서 갖은 회유와 반 협박으로 말들을 쥐어짜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새파랗게 어린 순경에게는 더더욱. 그들은 스코틀랜드 야드의 위엄을 우습게 보는 것만큼이나 마찬가지로 이웃이 당하는 참극에 무관심했다. 또 한 놈 흙으로 돌아갔나보지. 어차피 파리 목숨 취급받는 인생, 남의 일에 끼어들어봤자 득 될 것 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 앞에 선 이 아이는 주먹을 쥔 채 이 쪽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다. 피해자에게 냉담한 무관심만을 표한 어른들을 원망하고 있다. 번짓수가 틀렸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네 분노가 향할 곳은 ‘사람이 죽었다’라는 외침을 듣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웃들이라고. 그럼에도 그렉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이어질 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더러운 이스트 엔드의 매춘부 따위가 죽어나가봤자 뭐가 문제가 되냐고. 그런 취급을 받아도 싸다고. 긍지 높으신 런던 시민들은 나태한 이스트 엔드에 천벌이 내려져야 마땅하다고 굳게 믿으시니까!”
 “...”
 “뭐가 ‘대영제국’이야, 뭐가 ‘신사의 나라’야.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며 놓고, 안 보이는 뒤편에 우리를 구석에 격리해 놓고 못 본 척하면서. 하수구의 썩은 물을 받아먹고 사느라 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하루에도 열댓 명씩 봐야 하는 기분을 알아? 기껏 살아남아도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둑, 소매치기, 매춘밖에 없는 삶이 상상이 가? 부모 없는 아이들을 그렇게 먹여 살리다가 비명횡사를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게...”
 쉼없이 따박따박 쏘아붙이던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더니, 그대로 말끝을 흐렸다. 방금 말로 모든 상황이 설명이 되었다. 이 아이는 피해자의 죽음을 도저히 남의 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가능하게 해 준 그녀가 당한 폭력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얼마나 아이를 치떨리게 했을지 대강은 짐작이 갔다.
 “뭐라고 말 좀 해 보시지 그래?”
 계속해서 말이 없는 그를 보고 아이가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혼쭐을 내 줘야겠다는 마음은 이미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아이가 한 말을 부인할 수도 없었다. 요 근래 그 자신 역시 결이 같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으니까. 그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정작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는 뱉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미안하다.”
 “...”
 “내가 무력해서... 얼른 범인을 잡지 못해서. 이런 세상을 네 나이 아이들에게 물려주게 되어서. 미안해.”
 그의 답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아이의 얼굴에 아까보다 더한 분노의 기색이 확 일었다가 다음 순간 사그라들고, 이어서 입술을 앙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렉슨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잠시 동안 머뭇거렸던 아이는 결국 손수건을 받아들어 정신없이 눈가를 닦았다. 곧 죽어도 울음소리는 내지 않으려 숨을 삼키는 아이를 보며 그렉슨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아이의 눈물이 대충 멎었을 때쯤 그는 조용히 타박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사다리를 거꾸러뜨리면 쓰나.”
 “이...이렇게라도 안 하면 관심을 가질 리가 없으니까.”
 “뇌진탕이라도 일으켰으면? 죽었으면 어떻게 할래. 네 말을 들어 줄 사람은 더 없어졌을 텐데. 잘못하면 순경 살해 혐의로 잡혔을지도 모르지.”
 “상관없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인생인데.”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아이가 피식 웃으며 자조적으로 내뱉자마자 그렉슨은 어느 때보다도 힘주어 말했다. 얼떨결에 이 쪽을 얼떨결에 올려다본 아이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그는 한 번 더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
 “넌 아직 살아갈 날이 많아. 지금은 의미없어 보일지도, 우스울지도 몰라. 하지만 하루하루 줄어들수록 생각이 달라질걸. 더 이상 낭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어.”
 “...별로 살고 싶어서 살아 있는 것도 아닌데.”
 “지금은 그렇대도, 미래의 너는 다를 거야.”
 아이는 여전히 그의 말이 씨도 안 먹힌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콧방귀만 끼고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적의가 누그러진 모양새였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밤이 깊어만 가는데 언제까지고 소녀를 위험한 거리에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이제 들어가, 시간이 많이 늦었다. 집은 어디야?”
 “알아서 뭐 하려고?”
 “데려다 줄게.”
 “됐네요, 경찰한테 위치 털려봤자 좋을 거 하나 없거든!”
 말을 마치자마자 아이는 쌩 도망치듯 달려갔다. 자식, 달리기 하나는 빠르네. 미처 좇아가기도 전에 멀어지는 등을 황망하게 보고 있으려니, 저 멀리에서 아이가 소리쳐 왔다.
 “아저씨!”
 “아저.. 왜!”
 “내가 죽으면 잡아 줄 거야? 날 죽인 범인!”
 그 말에 그렉슨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저딴에는 신뢰를 보인다며 한 말일 테다. 그런 말이 어째서 자신이 살해당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가. 답하지 못하고 있는 그를 재촉하듯 아이가 다시 묻고, 결국 그는 질려서 대답하고 말았다.
 “안 잡아 줄 거야?”
 “그래, 꼭 잡을게, 그래!”
 “진짜지?”
 “그래! 최선을 다해서!”
 그 답에 만족했는지, 아이는 다시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오른팔을 들어 건성으로 인사를 하며. 그렉슨은 그 자리에 멈춰서서 아이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뭐가.”
 “그 사람은 결국 무사했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는 지나를 보며 그렉슨은 기가 찼다. 이런 어둡고 칙칙한 얘기 어디에 저렇게 눈을 빛낼 만한 거리가 있다고.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내려다보았지만 지나는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답했다.
 “다신 만날 수 없었어.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싶었지.”
 “뭐야 그게. 그럼 결국 무사한지는 모르는 거-”
 “적어도 형사 사건의 피해자로 그 아이가 오르는 일은 없었어.”
 자신의 말을 자르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보스가 눈을 살짝 피하는 것을 지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한층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뜻을 잠시 가늠해 본 지나가 놀란 마음으로 물었다.
 “설마 지금까지 내내... 확인한 거야? 사건 파일들을...”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오랫동안 손을 대지 않아 얼음이 녹은 탓에 밍밍했다. 완전 물 맛이네, 공연히 투덜거리면서 그렉슨은 마음 속으로 되뇌었다.
 결국 나는, 우리는, 잭 더 리퍼를 잡지 못했으니까.
 그 많은, 최소한의 존엄도 지켜지지 못한 희생자들의 한을 풀어 주지 못했으니까.
 아직도 런던은 이스트 엔드를 본 체 만 체하고 있으니까. 없는 척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그 한 명과 한 약속만이라도.
 “-보스? 들려, 보스?”
 갑자기 그의 시야에 들어온 지나의 얼굴이 의식의 흐름을 끊었다. 그렉슨은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깜짝이야. 왜?”
 어떻게 봐도 호의적이라 볼 수 없는 반응인데도 지나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맥락 모를 표정에 그렉슨은 한층 수상쩍다 생각하며 마주보았다. 다음 순간, 지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려주었다.
 “역시 보스는 내 보스야.”
 “뭐?”
 “못 들었으면 됐어.”
 “싱겁기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지나를 보던 그렉슨도 힘이 빠져 피식 웃었다. 문득 지나에게 그 때 그 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줄곧 그랬다. 어른을 믿지 못하고 법정에 연막탄을 쏴 대는 소매치기 소녀. 불신과 공포에 가득 찬 말들을 내뱉는 아이를 볼 때마다, 아득한 옛날 번득이는 눈으로 노려보던 그 때 그 아이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그 셜록 홈즈의 어처구니없는 부탁, 아니, 협박을 동반한 반강제적 요청을 결국 들어 주게 된 것은.
 그렉슨은 눈을 감고 짧게 기도했다.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 수 없는 신이여, 부디 이 아이를 지켜 주시기를. 저로 하여금 이 아이의 앞날을 열어가는 것을 돕도록 힘을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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